마인드닥터컬럼
내용
덩더쿵,덩더쿵... 어릴적 ‘굿‘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어른들 틈에 끼어서 본 굿의 모습들은 어린 내 눈에 신기하고 무서웠다. 그리고 아련하게 슬펐다. 신이 들린 무당이 펄펄 뛰며 귀신이 들린 모습은 괴기스럽고 무서웠다.
굿을 청탁한 사람들이 무당의 몸에 들린 귀신에게 잘못을 빌며 목 놓아 우는 모습은 슬펐다. 그래서 무당은 일반인들에게는 저 쪽 세계의 사람으로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리라.
이러한 무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정신과의사가 되고 난 다음이었다. 그 당시 정신과의 원로선생님이 무속에 관심을 가지고 학문적으로 성과를 이루어 논문을 발표하는 것을 보아왔다.
사실 ‘빙의’현상에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조울증같은 정신질환을 신들림 현상으로 보고 신내림 굿을 하는 등 치료의 시기를 놓치는 경우를 보아왔는데, 가끔 빙의라고 하는 진짜 신들림현상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죽음을 대하면서 종교가 생겨났다고 하는데 죽음이 끝인지, 시작인지 궁금하였으리라. 세상으로 우리를 보낸 존재가 있다면 거두어 가는 주체가 있을 것이라고. 이는 神 으로 불리며 산자들은 신을 추종하고 제사를 지내온 것이다. 신과 사람사이에서 죽은자와 산자사이에서 이러한 중간역할을 한 것이 무당의 기원이라고 한다. 예지자의 역할도 있었을 것이나 우리나라에서 무속의 역할은 살풀이로 대변되는 굿의 주재자로 전승되어왔다.
정신과 의사노릇을 하면서 마음속에 한이 많이 맺혀 우울증이 심한 분들을 보아왔다. 극단적인 생각과 어두운 그림자를 보면서 이분들이 살려는 본능(리비도)보다는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에 가깝다는 것을 느낀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줘야 하는 정신과의사의 입장에서 죽음에 대한 정서와 생각이 정말 많은 것이 사실이다. 융은 삶은 죽음을 위한 준비이고 죽음은 삶에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하였다. 정말 공감이 가는 말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다큐멘타리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였다는 “영매“라는 작품을 보았다. 감독은 3년간 무당들과 같이 지내며 무속의 전문가 수준이 되면서 만든 깊이 있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억~억~ 하며 울게 만든 것은 박기복이란 감독이 무당에 대한 깊은 공감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이었다.
또한 무당들의 삶에서 지극히 인간다운 고뇌와 살이를 통해 또한 자신의 문제임을 공감하였기 때문에 서러움까지도 느꼈다.
큰언니부터 막내까지 모두 무당을 길을 걷는 진도의 네자매, 한서린 어머니의 귀신이 몸에 들어온 시골 아낙네 강신무 무당, 어머니의 귀신과 자신의 귀신이 서로 불화가 심해 괴로워하는 모녀 무당 등이 등장해 죽은 사람의 한을 달래고 산 사람의 애통함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살 아들의 급사 앞에서 울부짓는 엄마앞에서 무당은 자신의 몸에 아들의 혼을 불러들인다. 죽은 자는 갈 길을 가기 전에 산자들과 울음과 대화로서 원한과 절망을 푼다. 산자들은 갑작스런 사별로 인한 애통과 죄책감을 풀고 죽은 자와 화해한다.
이러한 작업은 다분히 살아남아 죄스럽거나 아픈 산자들을 위한 지지적인 풀이의 마당인 것이다.
실제 혼백이 있는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의 여부는 이 글에서 중요하지 않다. 죽은 자가 우리 마음에 살아 있다면, 화해하지 못한 채로 한이 되어 산자의 골수에 박혀있는 것이 문제이다.
이렇게 보면 영매인 무당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극중 나레이션(영화배우 설경구)의 말처럼 “사랑하는 것도,상처주는 것도 가족에게서 배운다”는 것이 가슴에 와 닿는다. 죽은 자와 영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다. 죽은자와 이렇게 소통하기 전에 살아있을 때 좀 더 사랑하고 소통을 위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을...
다큐멘타리 속에서 산자와 죽은자의 화해를 시도하는 ‘인간’으로서 보통 사람들보다 몇곱절의 고단한 사연을 안고 사는 무당들도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있을 때 사랑하고 잘 해!
< ‘울산수필’ 기고 >
덩더쿵,덩더쿵... 어릴적 ‘굿‘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어른들 틈에 끼어서 본 굿의 모습들은 어린 내 눈에 신기하고 무서웠다. 그리고 아련하게 슬펐다. 신이 들린 무당이 펄펄 뛰며 귀신이 들린 모습은 괴기스럽고 무서웠다.
굿을 청탁한 사람들이 무당의 몸에 들린 귀신에게 잘못을 빌며 목 놓아 우는 모습은 슬펐다. 그래서 무당은 일반인들에게는 저 쪽 세계의 사람으로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리라.
이러한 무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정신과의사가 되고 난 다음이었다. 그 당시 정신과의 원로선생님이 무속에 관심을 가지고 학문적으로 성과를 이루어 논문을 발표하는 것을 보아왔다.
사실 ‘빙의’현상에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조울증같은 정신질환을 신들림 현상으로 보고 신내림 굿을 하는 등 치료의 시기를 놓치는 경우를 보아왔는데, 가끔 빙의라고 하는 진짜 신들림현상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죽음을 대하면서 종교가 생겨났다고 하는데 죽음이 끝인지, 시작인지 궁금하였으리라. 세상으로 우리를 보낸 존재가 있다면 거두어 가는 주체가 있을 것이라고. 이는 神 으로 불리며 산자들은 신을 추종하고 제사를 지내온 것이다. 신과 사람사이에서 죽은자와 산자사이에서 이러한 중간역할을 한 것이 무당의 기원이라고 한다. 예지자의 역할도 있었을 것이나 우리나라에서 무속의 역할은 살풀이로 대변되는 굿의 주재자로 전승되어왔다.
정신과 의사노릇을 하면서 마음속에 한이 많이 맺혀 우울증이 심한 분들을 보아왔다. 극단적인 생각과 어두운 그림자를 보면서 이분들이 살려는 본능(리비도)보다는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에 가깝다는 것을 느낀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줘야 하는 정신과의사의 입장에서 죽음에 대한 정서와 생각이 정말 많은 것이 사실이다. 융은 삶은 죽음을 위한 준비이고 죽음은 삶에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하였다. 정말 공감이 가는 말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다큐멘타리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였다는 “영매“라는 작품을 보았다. 감독은 3년간 무당들과 같이 지내며 무속의 전문가 수준이 되면서 만든 깊이 있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억~억~ 하며 울게 만든 것은 박기복이란 감독이 무당에 대한 깊은 공감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이었다.
또한 무당들의 삶에서 지극히 인간다운 고뇌와 살이를 통해 또한 자신의 문제임을 공감하였기 때문에 서러움까지도 느꼈다.
큰언니부터 막내까지 모두 무당을 길을 걷는 진도의 네자매, 한서린 어머니의 귀신이 몸에 들어온 시골 아낙네 강신무 무당, 어머니의 귀신과 자신의 귀신이 서로 불화가 심해 괴로워하는 모녀 무당 등이 등장해 죽은 사람의 한을 달래고 산 사람의 애통함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살 아들의 급사 앞에서 울부짓는 엄마앞에서 무당은 자신의 몸에 아들의 혼을 불러들인다. 죽은 자는 갈 길을 가기 전에 산자들과 울음과 대화로서 원한과 절망을 푼다. 산자들은 갑작스런 사별로 인한 애통과 죄책감을 풀고 죽은 자와 화해한다.
이러한 작업은 다분히 살아남아 죄스럽거나 아픈 산자들을 위한 지지적인 풀이의 마당인 것이다.
실제 혼백이 있는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의 여부는 이 글에서 중요하지 않다. 죽은 자가 우리 마음에 살아 있다면, 화해하지 못한 채로 한이 되어 산자의 골수에 박혀있는 것이 문제이다.
이렇게 보면 영매인 무당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극중 나레이션(영화배우 설경구)의 말처럼 “사랑하는 것도,상처주는 것도 가족에게서 배운다”는 것이 가슴에 와 닿는다. 죽은 자와 영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다. 죽은자와 이렇게 소통하기 전에 살아있을 때 좀 더 사랑하고 소통을 위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을...
다큐멘타리 속에서 산자와 죽은자의 화해를 시도하는 ‘인간’으로서 보통 사람들보다 몇곱절의 고단한 사연을 안고 사는 무당들도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있을 때 사랑하고 잘 해!
< ‘울산수필’ 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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