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닥터컬럼
내용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듣는 직업이 정신과의사라는 것에 토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이런 힘들고 우울한 사연들에 접하다 보니 우리의 삶이 고통이라는 이분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러한 고통들을 안겨주는 삶의 장치들은 우리가 선택할 수가 없는 것들이니 어떡하겠는가. 어떤 환경에 태어나느냐,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적인 영향을 받지만 이는 삼신할머니나 神의 영역이다. 역시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던져지는 우연과 필연의 일들은 또한 우리를 수동적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러니 그저 운명으로 여기고 산다는 어느 여성분의 말씀에 공감이 간다.
내 앞에서 인생의 3막4장을 토로하는 것을 들으면 그들에게서 질투, 분노, 기쁨, 회한, 두려움 등의 감정들을 볼 수 있다. 이런 감정들은 사람이 불완전하고 허점투성이니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증거가 아닐까.
나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과거는 추억이니까 대체로 좋은 기억들이다. 하지만 나 또한 그 당시에는 어지러운 감정들이 널뛰었었다. 어느 감정이 더 강렬하고 본능적인지 경쟁하는 것 같았다.
질투만 하더라도 사람의 역사에서 풍파를 일으키는 주범이었고 픽션에서도 영원한 주제가 되어왔다. 여성들은 모든 여자를 두고 질투를 하고 남자는 경쟁하는 남자들에게 질투를 느낀다고 한다.
한 여자가 아름다워 남자들의 눈길을 끈다면 그 주위의 모든 여성들의 눈빛은 그 여성에 대한 적의를 띄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남자들은 그들 앞에서 같은 동료나 경쟁자의 칭찬을 하지 않으면 되니 그나마 덜하다.
질투이외에 공포만큼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삶의 매순간마다 우리가 걱정을 하는 이유가 일이 잘못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가.
실패할 가능성이 낮은 경우에도 그 부정적인 상상에 대한 걱정으로 번민했었다. 그래서 걱정하느라 소중한 사람들과의 아까운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이 후회된다.
이런 공포를 극복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 것이다. 회피하면 더 달라붙는 것이 공포이니까 직면하고 친숙하려는 노력이 치료적인 변화인 것이다.
폐쇄공포증의 경우 폐쇄된 공간이 무서워도 그곳에서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가두지 못한다고 깨닫는다면 달라지게 된다. 우울증에 걸린 분들은 우울한 감정을 노려볼 수 있게 되니 우울 너머에 있는 희망을 믿게 되어 우울의 수렁에서도 빨리 빠져나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을 좋아하고 흠모한다. 그의 신화에 대한 박식한 설명을 듣고 있자면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신화는 전설에 불과하고 결국은 거짓말이 아니냐’는 말에 그는 ‘신화는 삶의 메타포이고 ‘살아있음’을 경이롭게 만드는 인류의 정신적 유산‘이라고 넌지시 말한다.
삶의 고통에 대한 그의 처방은 고통과 슬픔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간의 숙명적인 슬픔과 고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조언한다.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예’라고 말할 수 있게 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며 초인(?)이 되라는 주문도 하고 있다.
죽음과도 화해해야 하는데 광활한 우주에서 인간의 유한성의 의미를 찰나라도 각성하는 것이 그 방법이 될 것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죽더라도 연결된 또 다른 우리인 후세들이 살아나가는 것이니까. 법정스님도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다움 마무리이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전에 말씀하셨다.
집단 무의식으로 우리들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캠벨의 말은 공감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가 된다. 공감은 타인의 슬픔이 그냥 나의 슬픔이 되는 연결됨이 아닌가. 공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너무 안타까웠던 일을 떠올려야 하겠다.
몇 년 전에 충격적인 사고가 있었다.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던 울산 내황 초등학교 3학년아이들 세 명이 강물에 휩쓸려 생명을 잃고 말았었다. 친구가 허우적거리며 물 속에 잠기자 안타까운 마음에 앞 뒤 재지 않고 바로 뛰어 들어 갔을 것이다. 이런 의사자들 중에는 전혀 모르는 타인의 위기에도 선선히 자기 목숨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공감적이고 이타적 희생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이것은 정말 신비스러우며 이성조차도 아무런 설명을 해줄 수 없으며 현실의 경험에서도 전혀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런 행동은 자신과 타인이 사실은 하나라는 진리를 본능적으로 인식한 데에서 나온 행동’ 이라고 했다.
‘생존은 두 번째 법칙이다. 첫 번째 법칙은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삶의 여정은 목적은 공감이다.’ 라는 캠벨의 선승 같은 이 말은 공감에 대한 절절한 표현이다.
직면하여 슬픔과 화해하는 것은 우울의 나락에서 회복하는 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상처를 겨우 추스르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주위 사람들의 고통에 눈을 뜨고 공감하려고 한다.
남편의 부도 등의 충격으로 빚더미에 앉게 된 내 환자는 어린 딸아이 앞에서 아이처럼 눈물을 펑펑 쏟으며 죽고 싶다고 절망했었다. 그 뒤 아직 모든 상황은 그대로이지만 우울에서 벗어난 그이는 그동안 의지했었던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할 줄 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던 친척들의 고통까지도 같이 아파하더라.
이런 분들은 나에게 고통 속에서의 삶의 광휘를 보게 해주는 교사들이다. 나도 이들처럼 힘들게 되더라도 사는 게 고통이라고 느낄 때에 그 슬픔과 화해해야 하겠다. 그 모든 것에 ‘예’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살아 있음’ 에 대한 ‘공감’ 이라고 받아들이며.
( '울산수필' 기고 )
이러한 고통들을 안겨주는 삶의 장치들은 우리가 선택할 수가 없는 것들이니 어떡하겠는가. 어떤 환경에 태어나느냐,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적인 영향을 받지만 이는 삼신할머니나 神의 영역이다. 역시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던져지는 우연과 필연의 일들은 또한 우리를 수동적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러니 그저 운명으로 여기고 산다는 어느 여성분의 말씀에 공감이 간다.
내 앞에서 인생의 3막4장을 토로하는 것을 들으면 그들에게서 질투, 분노, 기쁨, 회한, 두려움 등의 감정들을 볼 수 있다. 이런 감정들은 사람이 불완전하고 허점투성이니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증거가 아닐까.
나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과거는 추억이니까 대체로 좋은 기억들이다. 하지만 나 또한 그 당시에는 어지러운 감정들이 널뛰었었다. 어느 감정이 더 강렬하고 본능적인지 경쟁하는 것 같았다.
질투만 하더라도 사람의 역사에서 풍파를 일으키는 주범이었고 픽션에서도 영원한 주제가 되어왔다. 여성들은 모든 여자를 두고 질투를 하고 남자는 경쟁하는 남자들에게 질투를 느낀다고 한다.
한 여자가 아름다워 남자들의 눈길을 끈다면 그 주위의 모든 여성들의 눈빛은 그 여성에 대한 적의를 띄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남자들은 그들 앞에서 같은 동료나 경쟁자의 칭찬을 하지 않으면 되니 그나마 덜하다.
질투이외에 공포만큼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삶의 매순간마다 우리가 걱정을 하는 이유가 일이 잘못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가.
실패할 가능성이 낮은 경우에도 그 부정적인 상상에 대한 걱정으로 번민했었다. 그래서 걱정하느라 소중한 사람들과의 아까운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이 후회된다.
이런 공포를 극복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 것이다. 회피하면 더 달라붙는 것이 공포이니까 직면하고 친숙하려는 노력이 치료적인 변화인 것이다.
폐쇄공포증의 경우 폐쇄된 공간이 무서워도 그곳에서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가두지 못한다고 깨닫는다면 달라지게 된다. 우울증에 걸린 분들은 우울한 감정을 노려볼 수 있게 되니 우울 너머에 있는 희망을 믿게 되어 우울의 수렁에서도 빨리 빠져나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을 좋아하고 흠모한다. 그의 신화에 대한 박식한 설명을 듣고 있자면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신화는 전설에 불과하고 결국은 거짓말이 아니냐’는 말에 그는 ‘신화는 삶의 메타포이고 ‘살아있음’을 경이롭게 만드는 인류의 정신적 유산‘이라고 넌지시 말한다.
삶의 고통에 대한 그의 처방은 고통과 슬픔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간의 숙명적인 슬픔과 고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조언한다.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예’라고 말할 수 있게 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며 초인(?)이 되라는 주문도 하고 있다.
죽음과도 화해해야 하는데 광활한 우주에서 인간의 유한성의 의미를 찰나라도 각성하는 것이 그 방법이 될 것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죽더라도 연결된 또 다른 우리인 후세들이 살아나가는 것이니까. 법정스님도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다움 마무리이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전에 말씀하셨다.
집단 무의식으로 우리들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캠벨의 말은 공감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가 된다. 공감은 타인의 슬픔이 그냥 나의 슬픔이 되는 연결됨이 아닌가. 공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너무 안타까웠던 일을 떠올려야 하겠다.
몇 년 전에 충격적인 사고가 있었다.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던 울산 내황 초등학교 3학년아이들 세 명이 강물에 휩쓸려 생명을 잃고 말았었다. 친구가 허우적거리며 물 속에 잠기자 안타까운 마음에 앞 뒤 재지 않고 바로 뛰어 들어 갔을 것이다. 이런 의사자들 중에는 전혀 모르는 타인의 위기에도 선선히 자기 목숨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공감적이고 이타적 희생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이것은 정말 신비스러우며 이성조차도 아무런 설명을 해줄 수 없으며 현실의 경험에서도 전혀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런 행동은 자신과 타인이 사실은 하나라는 진리를 본능적으로 인식한 데에서 나온 행동’ 이라고 했다.
‘생존은 두 번째 법칙이다. 첫 번째 법칙은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삶의 여정은 목적은 공감이다.’ 라는 캠벨의 선승 같은 이 말은 공감에 대한 절절한 표현이다.
직면하여 슬픔과 화해하는 것은 우울의 나락에서 회복하는 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상처를 겨우 추스르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주위 사람들의 고통에 눈을 뜨고 공감하려고 한다.
남편의 부도 등의 충격으로 빚더미에 앉게 된 내 환자는 어린 딸아이 앞에서 아이처럼 눈물을 펑펑 쏟으며 죽고 싶다고 절망했었다. 그 뒤 아직 모든 상황은 그대로이지만 우울에서 벗어난 그이는 그동안 의지했었던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할 줄 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던 친척들의 고통까지도 같이 아파하더라.
이런 분들은 나에게 고통 속에서의 삶의 광휘를 보게 해주는 교사들이다. 나도 이들처럼 힘들게 되더라도 사는 게 고통이라고 느낄 때에 그 슬픔과 화해해야 하겠다. 그 모든 것에 ‘예’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살아 있음’ 에 대한 ‘공감’ 이라고 받아들이며.
( '울산수필' 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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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humans, the best for them is not to be born at all, not to partake of nature's excellence; not to be is best, for both sxxes. This should be our choice, if choice we have; and the next to this is, when we are born, to die as soon as we can.' It is plain therefore, that he declared the condition of the dead to be better than that of the living.
1 년전
– Aristotle, Eudemus (354 BCE), surviving fragment quoted in Plutarch, Moralia. Consolatio ad Apollonium, sec. xxvii (1st century CE) (S. H. tran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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